창고 위치로그  |  태그  |  미디어로그  |  방명록
icon 퍼즐버블
사진일기 | 2017. 12. 11. 00:40

가끔 우울해질 때가 있다. 


단순히 외로워서 그런 건지, 지금 내 처지가 불만족스러워서인지 아니면 오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공간 속에서 나 혼자 허전함을 느끼는 건지, 그저 지금 누군가와 교류라는 걸 하는 이들이 부러워서인지는 잘 모른다. 사실 혼자라서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 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가 내게 하자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못 놀아봤고 못 겪어본 것에 대한 단순한 동경도 아니다. 메이트를 만들기 위해 시간과 돈을 들이고 싶은 의사도 없다. 감정 소모에 지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어떠한 파도도 일지 않는 지금이 좋다. 그러니 그냥 이유 불명이라고 해둘까. 


이러한 우울한 감정들은 비정기적으로 나를 찾아와 괴롭히곤 한다. 이를 맛있는 음식으로 해소해보겠다고 평일 오후 레스토랑에서 비싼 파스타를 사먹어 봤다. 한낮의 조용함과 여유가 좋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접시에 담긴 느끼한 요리가 좋았다. 그 다음엔 새벽에 쿨한 척 전 남친에게 전화를 걸어 재잘대기도 하고, 퇴근길에 동전노래방에 들러 윤도현밴드의 옛 노래를 소리높여 부르기도 했다. 오늘은 주차장 근처에 있던 용호동 오락실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더라. 


퍼즐버블. 나의 솔플의 상징. 내가 오락실에서 유일하게 잘 하는 게임이다. 대학교 복학 후 거의 세 학기 동안 수업을 매일 혼자 들었다. 오전 수업 듣고, 정문 근처 식당에서 4,500원 짜리 김치볶음밥이나 돌솥비빔밥을 사 먹고, 남들이 으레 다음 코스로 카페에 들러 저렴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 나는 혼자 오락실에 가곤 했다. 레벨링에 집착한 건 아니었지만, 일 년 가까이 그 게임만 팠더니 나중엔 200원 넣고도 거의 20레벨까진 갈 정도로 실력이 늘더라. 


나름 자랑거리다 싶어서, 남자친구가 생길 때마다 영화관이나 쇼핑 거리 근처 오락실을 발견하면 꼭 손을 잡고 이끌었다. 딱 한 판만 할게, 하고 앉아서 애가 20분이 넘도록 죽질 않으니, 처음엔 감탄하던 이들도 나중엔 말없이 이거 언제 끝나나 지켜보는 지겨운 시선을 보내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다음부터 또 한참을 그 게임을 외면하곤 했다. 사실 그걸 막 애정해서 한 건 아니고, 그냥 시간 떼우려고 했던 것뿐이니까.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학교 앞을 떠났으므로, 그 게임을 연습(?)할 일도 더 이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들어간 오락실에는 입구 바로 앞에 퍼즐버블 머신이 있었다. 펌프, 노래방, 철권, 테트리스, 1945 등 여러 종류의 게임이 많았지만 나는 습관처럼 또 퍼즐버블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동전을 바꾸고, 자리에 앉았다. 인서트에 300원을 집어넣고 게임을 시작했는데, 우습게도 손이 방향과 각도를 기억하고 있더라. 운빨도 받아서 꽤 고레벨까지 올라갔는데, 화면을 보여줄 친구가 슬프게도 없었다. 다시 23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 게임을 혼자 하고 있는 나. 그 때랑 다를 바가 없잖아. 


다음에 혹시라도 새 연인이 생긴다면,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여줄까, 그냥 모른 척할까. 




'사진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 쉘든 (Young Sheldon)  (0) 2018.01.16
덕수궁 석조전 & 신년 모임  (0) 2018.01.16
덩케르크&택시운전사  (0) 2017.08.05
키티버니포니 파우치 구매  (0) 2017.07.03
남포동 에머이  (0) 2017.05.05

arrow 트랙백 | 댓글



관리자  |   글쓰기
BLOG main image
덕질 기록용으로 사용하는 블로그. 하지만 덕후는 아닙니다
분류 전체보기 (133)
사진일기 (22)
여행 (42)
공놀이 감상일지 (22)
뮤직 토크 (13)
단호박 모드 (10)
WPC @ YOUTUBE (24)
- (0)
Total :
Today :
Yesterday :
rss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 관리자
국희's Blog is powered by Daum / Designed by plyfly.net